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글씨 도구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붓, 먹, 한지—이 세 가지는 단순한 재료를 넘어, 글씨에 감정을 담게 해주는 진짜 동반자들이다.
1. 붓끝에서 시작된 이야기
붓은 나에게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된 도구다. 손에 쥐는 순간, 긴장되면서도 묘한 설렘이 있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때는 너무 어렵고 낯설었다. 강약 조절이 어렵고, 종이 위에서의 방향이 자꾸 흔들렸다.
하지만 연습을 거듭할수록, 붓이 내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움직여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붓은 단순히 선을 긋는 도구가 아니다.
한 획 안에 속도, 감정, 힘, 쉼표 같은 것을 담아낸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써도 누가 어떤 붓으로 썼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된다.
나는 주로 중간 굵기의 모필을 사용한다.
너무 얇으면 감정이 얕아지는 느낌이 들고, 너무 굵으면 나의 손보다 글씨가 앞서 나가버리는 것 같다.
가끔은 낡은 붓을 일부러 꺼내 쓰기도 한다.
붓끝이 삐뚤어지고 탄력이 떨어진 그 붓은, 조금은 흐트러진 마음을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마치 사람도 너무 반듯한 날보단, 조금은 울퉁불퉁한 날이 더 진솔한 것처럼.
2. 먹은 글씨의 온도를 바꾸는 재료
먹은 글씨의 온도를 결정짓는다.
진한 먹으로 눌러 쓴 글씨는 강렬하고 단단하고, 희미하게 갈아 쓴 먹은 차분하고 유연하다.
먹향이 퍼질 때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먹을 갈 때의 그 ‘서걱서걱’하는 소리,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은 마치 마음을 정돈하는 의식 같다.
처음에는 번거로워서 먹물(완제품)을 썼지만, 점점 진짜 먹을 갈아 쓰는 시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하지만, 그만큼 글씨에 온기가 더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약간 물을 많이 넣고 갈아 만든 묽은 먹이다.
이 먹으로 쓴 글씨는 경계가 흐릿하게 번지고, 마치 감정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끔은 먹 대신 수묵화용 색 먹을 사용해 푸른빛이나 자줏빛을 섞어본다.
그러면 글씨에 계절이나 분위기가 더 명확히 느껴진다. 봄에는 연두빛, 겨울엔 회색 먹을 써보는 것도 나만의 작은 실험이다.
3. 한지, 감정을 가장 잘 받아주는 친구
한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글씨를 쓰는 순간 그 섬세한 질감이 붓끝을 통해 그대로 느껴진다.
처음 한지에 썼을 땐 놀랄 정도로 먹이 빨리 번져 퍼졌고, 그 번짐 속에서 뜻밖의 미를 발견했다.
한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긴장해서 붓을 눌렀을 땐 먹이 번지고, 망설이듯 손을 떼면 공백이 남는다.
그래서 한지 위의 글씨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솔직하게, 정직하게 써야만 한다.
한지의 매력은 표면의 자연스러움이다.
결이 있고, 결 따라 먹이 퍼지기에 쓰는 사람의 손끝에 따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직접 손으로 한지를 찢어내 엽서 형태로 만들어 글귀를 적곤 한다.
그 조각 하나에도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에, 받는 사람도 쉽게 잊지 못한다.
4. 디지털 도구와의 새로운 만남
전통 도구만 고집했던 나는 어느 순간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이라는 디지털 도구와도 만났다.
처음엔 손맛이 사라질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재미를 발견했다.
브러시의 강약, 종이 질감을 흉내 낼 수 있는 기능, 그리고 다양한 색 먹 표현은 디지털에서만 가능한 미학이었다.
무엇보다 빠르게 공유하고, 수정하고, 변형할 수 있다는 점은 디지털 캘리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프라인에서 엽서를 만들고, 온라인에선 그 글귀를 배경화면 이미지로 만들어 나누기도 했다.
붓과 한지로 기록한 감정을, 디지털로 다시 해석해 보는 일은 캘리그라피의 또 다른 여행처럼 느껴진다.
마무리하며
붓, 먹, 한지—그리고 그 사이에서 함께한 나의 시간들.
이 도구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내 감정을 온전히 담아주는 ‘마음의 통로’였다.
지금도 글씨를 쓰기 전, 나는 붓을 손에 쥐고, 먹을 갈며, 종이를 만지며 천천히 하루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조용한 준비 과정이 바로, 글씨보다 더 소중한 ‘캘리그라피’라는 여행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 추신: 도구를 고를 때 기억하면 좋은 팁
- 처음에는 붓펜으로 시작해도 좋아요. 익숙해지면 모필로 옮겨가보세요.
- 먹물보다 먹을 직접 갈아 쓰는 경험을 꼭 해보세요. 글씨의 깊이가 달라져요.
- 한지는 종류가 다양해요. 너무 얇지 않고, 번짐이 적당한 것을 골라보세요.
- 디지털 앱은 Procreate, Adobe Fresco, Tayasui Sketches 등을 추천해요. 붓 브러시를 활용해 감성적인 연출이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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